우리가, 긴축재정으로 경제부흥을 이루고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운영으로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최장기 집권을 하였던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대처 그리고 미국 국무부 장관이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으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 힐러리에 열광하는 것은, 그분들이 살아왔던 그 삶 자체가 유리천장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앞서 제시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 한국문학사 속에서도 대처와 힐러리처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남성작가 못지 않게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여성 작가들이 존재함에도 우리나라 역사 교육과정에서의 문제인식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강경애, 김명순, 나혜석
당시 여자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작가로서 화가로서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홀로 남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노동현실과 사회의식을 강조한 작품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글을 썼던 강경애, 문학 외적인 스캔들에 가려 당대에 작품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공식적으로 등단한 최초의 근대여성작가 김명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천재화가 나혜석,
철의 여인 대처와 대통령 후보 힐러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소설작품보다 더 소설같았던 그분들의 자기주도적인 삶을 보면서 분명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리라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분들의 작품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의 우리나라 근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 역시 대부분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당시 시대상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만큼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강경애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났다. 1931년 잡지 《혜성(彗星)》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2년 간도(間島)로 이주, 단편소설 《부자(父子)》 《채전(菜田)》 《소금》 등을 발표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장편 《인간문제》를 연재하여, 당시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를 대담하게 다루었다.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기본생존권조차 얻을 수 없었던 노동자의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소설로, 근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1935년 이후, 《해고(解雇)》 《지하촌(地下村)》 《어둠》 등, 사회의식을 강조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간도에서 귀국한 후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김명순
189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평양에서 부유한 김희경이라는 인물이었다. 《청춘(靑春)》지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의심의 소녀》는 전통적인 남녀관계에서 결혼으로 발생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최후를 그려내는 작품이며 이 작품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저항정신을 표현하였다. 그후에 단편 《칠면조(七面鳥)》(1921), 《돌아볼 때》(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꿈 묻는 날 밤》(1925) 등을 발표하고, 한편 시 《동경(憧憬)》 《옛날의 노래여》 《창궁(蒼穹)》 《거룩한 노래》 등을 발표했다.
1925년에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그후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작품도 쓰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정신병에 걸려 사망했으며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내용이 없다.
나혜석
1896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나혜석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후 둘째 오빠 나경석(羅景錫)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화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빠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崔承九)를 나혜석에게 소개하였다. 이미 본국에 조혼(早婚)한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와 나혜석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나혜석의 인생관은 돌변하여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게 되었다.
1919년 그녀가 일본 유학시절 발발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3월 25일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일본 유학생이었던 교토제국대학을 다니던 친일파 김우영(金宇英)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1920년 4월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21년 3월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전람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6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3년간의 유럽 일주 여행 도중 천도교 신파의 우두머리였던 최린(崔麟)을 만나게되고 김우영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최린은 나혜석과 불륜의 관계로 발전하고 결국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였다. 결혼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한 나혜석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 개최된 소품전의 실패와 아들 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생활을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교에 심취했으나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사망하였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는 《나부1928》, 《선죽교 1933》가 있다.